여느 때와 달리 기침이 연달아 나왔다. 준비해 간 사탕을 입에 물어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새벽 동네 예배당의 조용한 공기를 내 기침 소리가 갈라놓고 있었다. 병원에선 뜻하지 않은 임신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알러지 증상이 심해진 이유란다.
임신 5개월이 지난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일이 생겼다. 아기와 산모가 모두 위험하다는 진단이었다. 급히 산부인과 응급실에 입원을 했다. 유산을 방지하기 위해 매 순간 정확한 양의 약이 투약되도록 기계를 몸에 부착했다. 뒤척이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위험하다 했다. 가족들의 면회도 극도로 제한되었다.
나는 마치 나 홀로 토굴 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그곳은 입구도 출구도 없는 곳, 그저 시간이 내 편 이기만을 숨죽여 기다리는 곳이었다. 가끔씩 들려오는 옆방의 두런두런 소리는 나를 세상 밖으로 인도하여 숨통을 틔워주었다. 방 밖의 다급하고 위험한 발걸음에는 내 불안도 덩달아 널 뛰었다.
팔에는 여러 개의 호스로 링거들이 연결되었는데, 그것들은 마치 심장을 뛰게 하기 위한 혈관과도 같이 중후한 무게감으로 나를 눌렀다. 이곳에서 죽음을 맞는다면 생의 마지막을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갈 것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이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것이다.
강제로 침대에 누우니 그제서야 보이는 지나간 시간들. 35년의 어느 한순간도 내세울 것이 없는 삶이었다. 나만을 위해 산 삶은 내가 죽는 순간 동시에 사라질 것이다. 설사 내게 시간이 더 주어진다 해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인생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삶이었다. 거기에 나답게 잘 살았다는 가치는 없었다.
거짓의 세상에서 진실을 지키는 삶. 정의가 무너진 세상에서 정의를 지키는 삶. 인간애가 상실되는 사회에서 인간애를 지키는 삶.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답게 사는 데 도움이 되는 삶인지 묻던 어느 노교수의 화두가 가슴에서 울렸다. 그 정도 대단한 삶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내게 의미 있는 삶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지.
누워있는 내게 자유로운 것은 한쪽 팔과 목이었다. 침대에 누워 고개를 돌려 눈으로 글자를 읽고, 자유로운 한 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병실에 비치되어 있는 성경책을 읽어나갔다.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것뿐이었다. 치료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여겨졌으나 어느 순간 불안을 잊고 시간을 잊는 마법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매 순간 들려오던 옆 분만실의 천지를 찢는 산고의 소리도, 세상에 신고식을 치르는 아기 울음소리도 점차 들리지 않았다. 귀에 딱지가 앉아 무뎌졌거나, 익숙하여 잔잔한 배경음이 되었을 것이다. 가끔 내 의식에 걸려든 소리에는 나를 대입하여 간절한 소망의 기도를 했다.
‘아기도 나도 살고 싶습니다.’
드디어 기적처럼 두 달의 토굴 생활을 벗어났다. 일반 병실로 옮긴 것이다. 거리낌 없는 햇살을 맞는 것과 여러 사람이 토해내는 숨을 들이키는 것은 참으로 살아있음에 가까웠다. 나를 제외한 그들은 진정 삶의 영역에 있다고 느껴졌다. 그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마침내 안정기에 들게 되자 퇴원을 하여 집에서 숨 고르기를 하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평화로운 어느 날, 아기가 장미 꽃송이를 한 아름 들고 수만의 꽃잎을 날리며 노크를 했다. 엄마 뱃속에서 10개월을 기다리지 못하고 미리 해 온 노크였다. 마침내 만남의 시간이 된 것이다. 인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라 생각했다. 지금부턴 의사의 영역, 그리고 신의 영역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엄청난 일을 목도하고 두려움으로 사색이 되어 도착한 산부인과 응급실. 나를 맞은 사람은 아침마다 혈관을 찾느라 내 팔을 그렇게도 찔러대던 간호사였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자 아이러니하게도 불안이 사라지고 스르르 안도가 되었다. 나의 응급실 두 달을 지켰으니 누구보다도 나를 잘 케어해 줄 것이란 믿음이 생겼다. 그건 한 가닥 희망을 향한 사다리가 되었다.
그날 친정아버지는 큰손주의 귀가를 담당하기 위해 우리 집으로 오셨는데, 온통 붉게 물든 집안은 위급했던 상황을 적나라하게 설명하고 있었단다. 어쩌면 딸이 당신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가, 이제 더 이상 못 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셨단다. 평소 무뚝뚝하고 위엄 있던 군인 아버지의 반전의 모습이었다. 그간 출가외인 이라며 거리 두기를 하셨던 아버지는 이후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신 건 물론이고, 기꺼이 손주와 손녀를 돌봐주러 오셨다.
그날 오후 아기는 아주 작은 몸을 가지고 태어났다. 한 달 일찍 태어나 당연히 인큐베이터에 들어갈 줄 알았더니, 딱 경계선의 몸무게와 머리 사이즈로 인큐베이터가 아닌 엄마 품으로 들어왔다. 실로 석 달여의 위험한 동행과 지난한 인내의 시간 끝에 이뤄진 만남이었다.
딸과의 조우를 위해 침대에 누워 지낸 시간은 나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성숙하게 하는 발효의 시간이 되었다.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닌 함께 사는 삶으로, 서툰 마음 한 조각이라도 희석하는 삶으로, 부족하지만 행복과 가치를 나누는 삶으로. 앞만 보던 시선을 옆을 보는 삶으로, 함께 사는 삶으로 내 인생 작은 표지판을 세우게 된 것이다.
자식을 키우면서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싱글의 나와 엄마로서의 나는 확연히 다른 결을 가진 사람이 된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 있었기에 삶에 대한 숙연한 상고도, 겸허한 마음도 가능했다. 주변을 향한 시선도.
아마도 자식은 그렇게 부모를 한 걸음 한 걸음 철들게 하는 스승인 듯하다. 따뜻한 온기는 나를 데우고 그대를 데우며 또 다른 그대를 데우는 힘이 있다는 걸 배웠으니 말이다.
오늘, 그 딸의 석사 학위식이 있었다. 수십 번의 밤을 지새우며 간신히 심사 날짜를 맞추는가 싶더니, 우수 논문상까지 받았다. 참으로 대견하다.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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