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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내 슬픔을 등에 지고가는 자

여작반

by 별난 이 2022. 10. 29.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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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이리 좀 와봐. 당신 친구 선이 씨 아들 아니야?”

회사 홈페이지를 둘러보던 남편이 나를 불렀다. 화면에 뜬 이름이 친구 아들과 같았다.

고등학교 동창인 우리 셋은 910일의 일정으로 겨울이 따뜻한 나라, 호주로 여행을 갔다. 가족의 굴레와 엄마로서의 의무감에서 벗어난 첫 여행이었고, 소녀 감성으로 돌아가 어릴 적 친구와의 동행이니 마냥 들떴다. 우린 방 두 개를 예약하여 번갈아 독방을 썼다. 긴 여행 일정에 피곤하지 않도록 고려한 거였다.

여행 닷새째의 아침, 여느 날과 같이 호텔 식당에 들어가기 위해 방 번호를 확인하는데, 앞장선 친구가 한참을 버벅거린다. 이른 시간인데다 여행지마다 매일 바뀌는 두 개의 방 번호가 헛갈렸나 보다. 인내심있게 친구를 기다려 주질 못하고 성질 급한 내가 방 번호를 체크하고 식당에 들어섰다.

우리 나이엔 다 그래. 우기지만 않으면 돼.”

민망할 친구에게 자연스레 위로의 말이 나왔다. 그즈음 우린 깜빡거리는 기억과 한 개씩 빼먹고 외출하는 실수로 당혹스러움과 마주하기 시작했다. 모태 건망증에 덜렁이인 내가 제일 먼저 그 서러움에 맞닥뜨렸다.

마트에서 두 시간이나 장을 보고, 계산대 앞에서 지갑이 없어 당황했던 일. 친구들과 대략 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해놓고, 휴대폰을 놓고 나가, 드넓은 광장에서 서로 헤매고 다닌 일. 한 달 전에 해놓은 약속을 까맣게 잊고, 우리가 언제 약속했냐고 되물어 그 모임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던 일. 내게는 그런 실수의 경험이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름의 대책이 내가 옳다고 우기지 않기였다. 실수를 인정하면 더 이상 큰 싸움으로까지 번지는 일은 없었으니까.

뷔페식당에 들어서니 고소한 빵 냄새와 향기로운 커피 향이 우릴 먼저 맞았다. 날 향해 늘어선 음식 앞에서 잠시 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행복을 음미하는 순간,

우겨서 될 때도 있거덩, 너두 우기거덩.”

좀전의 상황에 화가 났는지 친구는 식탁에 앉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휘리릭 가버렸다. 식당에 남겨진 우리는 덩달아 언짢아졌다. 계속 식사를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방으로 들어가 친구를 달랠 기분도 아니었다. 공연히 호텔 주변을 걸으며 발걸음에 화를 꾹꾹 눌렀다. 우기지 말라는 말이 그렇게 화를 낼 일이었는지, 방 번호를 잊은 게 그렇게도 민망한 일이었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행의 나머지 날 동안 친구의 저기압에 나는 점차 피곤해졌고 슬그머니 마음의 문을 닫았다. 다투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서로가 불편함을 참았고, 참는 것은 며칠이 한계였다. 여행을 가면 친구끼리 갈라선다더니 우리가 그랬다. 여행 후 나는 친구와의 만남을 슬그머니 피했고, 그렇게 조금씩 멀어졌다.

 

 

 

남편이 보고 있던 화면은 회사 홈페이지의 부고란이었다. 설마 하며 망설이다 친구의 아들에게 확인해보았다. 내 친구의 부음이 맞았다.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채 육 개월을 살지 못했다고 했다. 본인의 의사로 아무에게도 발병과 부고를 알리지 않았고, 코로나 시국으로 2일장을 치렀단다. 회사 부고란에도 장례를 치른 뒤에 올린 터였다. 일 년 남짓 뜸해진 사이에 이처럼 말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우리는 제대로 된 이별을 위해 추모원을 찾았다. 마침 차가운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는데, 산꼭대기에 자리한 친구는 혼자 사력을 다해 바람과 맞서고 있는 것 같았다. 외롭고 쓸쓸하고 안쓰럽게 느껴졌다. 다정다감한 남편, 잘 자라준 아들딸, 고매한 매너는 다 이 세상의 일일 뿐이었다.

친구가 병으로 먼저 하늘나라 소풍을 떠난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난 또 다른 마음의 짐이 생겼다. 슬픔으로 오열하는 순간에도 미처 풀지 못한 응어리가 남았다. 한 사람이 먼저 떠난 자리의 회색 슬픔은 무조건 남아 있는 자의 몫이었다. 오랜 시간 무거운 마음으로 친구를 가슴에 품고 지냈다. 힘이 들어 지쳐가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정보는 그 친구가 가장 빨랐다. 핫플래이스와 맛집, 유명 셰프의 레스토랑, 드라마에 나왔던 장소로 우리를 안내했고, 연트럴파크, 북촌한옥마을로 이끌었다. 불가근불가원이라고, 적당히 마음의 거리를 둔 관계라 여겼는데, 생각보다 많은 장소에 함께 했고 많은 시간을 공유했음을 알게 되었다.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불쑥불쑥 떠오르는 추억들과 마주하고 나니, 우리가 결코 불가근 불가원의 관계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무조건 친구를 이해하고 받아들였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있는 모습 그대로 품고 가는 것이 친구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인디언들은 친구나의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 말의 깊은 의미와 진작 진지하게 만났다면 지금과 같은 후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왜 시간은 우리에게 무한하게 남아 있으리라 생각을 했던 건지, 나는 왜 친구가 늘 내 곁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건지 나의 어리석음을 질책했다.

그해 가을, 우리는 서래마을의 미슐랭 맛집에서 만났다. 나는 불편한 마음은 덮고, 화해의 몸짓으로 참석했다. 링거를 맞느라 늦었다는 설명에도 둔한 우리는 친구가 병마와 힘겨운 싸움 중 이라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것이 친구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가을이었고, 마지막 만남이었으며, 마지막 안녕이었는데 말이다.

이 세상 어느 누가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 있을까. 사랑으로 지켜온 가족과의 헤어짐에 담담할 수 있을까. 평생을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온 삶과의 작별에 평화로울 수 있을까. 지축이 흔들리고 세상이 무너지는 충격으로 온통 슬픔이었으리라. 생의 마지막 순간을 오롯이 혼자 준비하고 맞이했을 것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먹먹해진다.

자신의 모든 충격과 슬픔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했던 친구의 결정은 처음엔 배신감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분노로, 가여움으로, 그리고 종국에는 미안함으로 그 파장이 바뀌었다. 어쩌면, 우리를 위한 배려였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내가 오랜 시간 자책하며 힘들어 하는 게 친구의 마음에 걸렸나 보다. 지난밤 꿈에 나타나 환한 미소로 긴 팔을 쭉 뻗어 힘차게 흔들고 있었다.

나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어.’

말을 건네고 있었다.

 

 

정지용님의 <<호수>> 가 떠오른다.

내 그리움 호수만 하니 지그시 눈 감을밖에.

 

나 이제 그만 울래. 나중에 보자. 그땐, 진심으로 너의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 되고싶어.

 

오늘, 생일 즈음에 맞춰 10월에 미국서 나온 친구와 함께

먼저 간 친구가 있는 시안에 들렀다.

가을 하늘은 맑았고, 햇살은 따뜻했다.

그 사이 제법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어, 외롭지 않아 보였다.

우리도 이제 친구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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