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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 인 일 닭 이야기

여작반

by 별난 이 2022. 1. 9.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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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깐부치킨을 사갖고 갈까?”

친구는 과일을 준비해 왔음에도 저녁의 메인이 허술할까 걱정이다.

무슨 그런 예의 없는 말씀을? 거기에 가면 꼭 먹어줘야 하는 메뉴가 있어. 나를 믿어.”

한 달에 최소 한 번 이상 못 만나면 절대로 안 되는 친구들이 코로나로 모임을 몇 달을 건너뛰었다. 간호사로, 유치원 원장으로, 카페 주인으로 각자의 자리를 건강하게 지켜야 하다 보니, 우리 모임은 매번 뒤로 미뤄졌다. 이번엔 야외에서 캠핑을 하자는 신선한 아이디어로 모임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맘먹고 술 달리기로 했는데 혹여나 치킨 배달이 안 될까 봐 미리 사서 가자고 한다.

 

내 사전에 한강 둔치에서의 메뉴는 딱 한 가지다. 무조건 치맥. <한강치킨>에서 방금 튀겨낸 프라이드 치킨과 차갑고 싱싱한 생맥주. 작은 사이즈의 치킨을 주문과 동시에 튀겨내 기름을 쪽 뺀 것이, 겉바속촉은 물론 옛날 시장에서 엄마 손 잡고 뜯던 추억의 그 맛까지 잡았다. 그래서 11닭은 필수다. 얌체 손님을 겨냥한 ‘11메뉴‘11음료이런 얘기를 들어본 적은 있으나 ‘11은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우리만의 공공연한 상용어다.

 

 

몇 년 전 사진 공부를 처음 시작했을 때의 일이다. 그날의 수업은 야간 촬영이었다. 동작대교에서 붉은색으로 물든 일몰의 장관을 찍고, 세빛둥둥섬 근처로 내려와서 일몰 후 푸른 보라색의 매직아워를 담았다. 반포대교에서 시간마다 뿜어내는 각양각색의 조명 담은 물 분수 쇼를 마지막으로 그날의 수업이 끝났다. 긴장한 마음으로 무거운 삼각대까지 메고 땀 뻘뻘 흘리며 먼 거리를 걸었으니, 이제 시원한 강바람에 몸을 맡기고 숨을 고를 순서였다.

바로 그 순간 내 앞에 딱 놓인 생맥주와 치킨. 우리의 운명 같은 첫 만남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31닭 입니다하는 반장님의 말씀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딱 봐도 한 마리는 먹어줘야 하는 겨우 손바닥만한 크기인데 말이다. 실망한 나머지 그 순간 참지 못하고 속마음이 툭 튀어나왔다.

“11닭은 기본인데요

그 이후에도 우린 똑같은 루트로 야간 촬영을 하곤 했다. 그때마다 반장님이 배달해 오는 치킨의 양은 늘 부족했다. 여전히 일관성 있게 11닭을 외치는 내 모습이 안타까운 다른 회원들은 당신 몫의 닭 다리를 내 빈 접시에 슬그머니 가져다 놓곤 했다. 짠하고 따뜻한 풍경이지만, 난 늘 치킨 한 마리가 고팠다. 나의 일 인 일 닭을 향한 갈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 치킨 먹으러 갈까?”

아들과 딸은 치킨을 좋아할 나이다. 아이들을 꼬드겼다. 순진한 아이들은 집 앞 어디쯤 가는 줄 알고 쫄래쫄래 따라나섰다가 한낮 34도의 땡볕 아래서 파라솔과 강바람에만 의지한 채 치킨을 먹었다. 생맥주도 마셨다. 이곳에서만 가능하다며 즉석 라면도 먹었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권했다. 이 정도는 보통인 대식가 식구들 덕분에 난 비로소 11닭의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어렵사리 이룬 소원이었음에도 생각만큼 기쁘지 않았다. 적당한 노동 후, 저녁 시간, 시원한 강바람, 함께 고생한 사진 친구들과의 이야기가 있는 나른한 분위기 속 치킨 한 마리였어야 했다.

 

 

오늘의 친구들은 캠핑이 처음이다. 어쩌면 오늘의 한강변 야외 모임으로 우리가 매달 만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의 루울 이라며 당연히 치킨 네 마리와 생맥주 넉 잔을 주문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마음 놓고 수다 떨고 먹고 마시니 내가 그리워했던 11닭의 기쁨도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내 접시의 닭이 줄지 않는다. 한 마리를 다 먹지 못하겠다. 맥주를 많이 마신 것도, 간식을 먹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식사 양이 많이 줄었다. 먹고 싶은 것도 별로 없었다. 입맛도 예전 같지 않았다. 나의 줄어든 음식의 양에 잠시 당황했다.

나의 식성으로 말하자면, 젊은 때는 뷔페식당에서 일곱 접시 정도는 가뿐히 먹어치우고, 단체 회식 땐 처음 고기 한 점부터 맨 마지막 한 점까지 쭈욱 쉬지 않고 먹는 먹방 최강자였다. 남편은 나와 4살 아들이 먹은 고기 값으로 14인분을 계산했던 얘기를 아직까지도 한다.

 

 

 

 

코로나에 갱년기에 나이 탓을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갑자기 서운함이 울컥 올라왔다.

까이꺼 한 마리 다 먹을 수 있을 때 다 먹게 해 주지.’

치킨 한 마리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대단한 무엇도 아니다. 아무 때나, 어디서나, 누르기만 하면 턱 하고 바로 배달이 되는 시대이니, 사소한 것이라며 그 순간의 재현을 꿈꾸었나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고, 젊음도 되돌릴 수 없으니, 식욕마저 따라 주지 않는다고 나이듦을 애둘러 탓할 필요는 없겠다.

그래 그만하면 애 썼다. 이제 그만 날려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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