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그리스인
이현수
아! 산토리니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시간은 2시간이다. 땀 뻘뻘 흘리고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카메라에 담느라 귀한 2시간을 거의 다 써 버렸다. 그제야 남편의 툭 튀어나온 입이 눈에 들어온다.
열심히 사진 찍은 나에게도, 짐꾼에게도, 휴식이 필요한 순간이다. 나도 사진의 막노동에서 우아한 여행자로 돌아가고 싶었다. 파란 바다를 원없이 바라볼 수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아이스카페라떼 두 잔을 주문하고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친절한 카페 직원이 커다란 어닝을 힘껏 돌려 펴준다. 넓은 테라스에 우리 둘뿐이었으나, 따가운 지중해의 햇살을 피하게 해 주려는 배려로 느껴졌다.
한참을 앉아 그리스의 파란 하늘과 짙푸른 바다를 보았다. 파란색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하얀색 건물들이 만들어 내는 산토리니의 풍광에 감탄을 연발했다. ‘여보 정말 고마워’ 이런 훈훈한 대화도 잊지 않고 오갔다. 이제 더 이상 오갈 얘기가 없어 서로의 눈만 껌뻑껌뻑 바라보는 순간, 아차, 크루즈가 떠날 시간이 다 되었음을 떠올렸다. 성질 급한 내가 카운터로 달려갔다.
“우리 커피 잊은 건가요?”
“두 분 풍광 즐기시라고요”
카페 직원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여행자들에게 그리스의 아름다운 풍경을 누릴 시간을 배려한 거였나보다. 화를 낼 수 없었다. 우리는 결코 흉내낼 수 없는 그들만의 느긋함이 보였다. 그들은, 그렇게 빼어난 자연경관도 갖고 있었고, 사람에 대한 배려도 있었고, 삶을 누리는 여유로움도 있었다. 아, 유구한 문화도 있지. 내가 기억하는 그리스, 그리스인이다.
오! 마이 수영복
마테오라에 도착했다. 내일은 사진으로만 봐 왔던 깎아 지른 절벽 위의 수도원을 돌아볼 계획이다. 설렘 가득하여 호텔에 도착했다.
야외 수영장이 우릴 먼저 반긴다. 풀의 사이즈도 크루즈의 그것보다 컸고, 햇살도 적당히 좋았다. 현지인들이 삼삼오오 풀을 즐기고 있었다. 나 또한 그들과 섞여 한 폭의 그림이 되고 싶었다. 바리바리 싸 온 수영복을 그대로 곱게 되가져가기 억울 했다. ‘이제 아니면 언제 이런 기회가 또 있을까?’ 하는 맘으로 물속으로 직행했다.
우선 몸풀기로 얌전히 한 바퀴 돌고 나니, 아까 풀 속에서 유유자적 있던 그들이, 하나둘씩 풀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곤, 우리 한국인 일행을 구경하는 게 아닌가?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한국 수영장에서처럼 수영을 몇 바퀴씩 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의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처음부터 예사롭진 않았다. 화들짝 놀라는 것 같았다. 아니, 왜 놀랐을까? 그들은 수영복이 모두 죄다 아찔한 비키니 차림인데, 난 꽃무니가 왕창 들어간데다 치마까지 나풀거리는 오리엔탈 원피스여서일까? 아직도 미스테리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자태가 그려지는 건 실패다.
수영 후 한잔의 맥주는 진리다. 생맥주와 그릭 치즈가 듬뿍 들어간 그릭샐러드를 수영장으로 주문했다. 석양을 배경으로 그리스산 생맥주 한 모금을 넘기니 짜릿하다. 좀전의 찜찜한 기억은 어느새 추억으로 바뀌었다.
아! 바를람 수도원
마테오라는 그리스어로 ‘공중에 떠 있다’라는 의미이다. 400 미터 높이의 아찔한 기암괴석 위에 지어진 수도원들은 마치 공중에 떠있는 것같아 보인다. 처음에는 수행자들이 인간 세상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수행하기 위해 높은 바위 사이 벼랑이나 동굴에서 수도했다. 신과 좀 더 가까운 곳에 있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오스만제국이 그리스를 지배하면서 수도원을 압박하자 수도사들은 이 험한 지역으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금욕의 생활을 하면서 어쩌면 오스만 제국에 의해 소멸할 뻔한 그리스의 전통과 헬레니즘 문화를 보존했다. 그런 이유로 수도원은 1988년 그리스를 대표하는 정교회 집성촌으로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수도원들은 세계 10대 불가사의 건축물이기도 하다. 전성기엔 24개나 되었던 수도원이 지금은 6개가 남아 일반인에게 개방되고 있다. 나는 그중 1518년에 지어진 바를람 수도원을 방문했다.
일반인들의 접근성을 위해 커다란 바위 사이에 다리도 놓고, 기암괴석에 계단도 파놓았다. 올라가기도 전에 입이 쩍 벌어진다. 당시 수도사들은 두레박으로 물품과 사람을 수직으로 들어 올렸다 한다. 마침 바를람 수도원은 보수 공사 중이었는데, 공사용 물품을 두레박으로 올리고 있었다. 이 세상 풍경이 아닌 듯하였다.
그런 바를람 수도원엔 지금 현재 단 한 분의 수도사님만 계신다고 한다. 이 멋진 문화유산을 관광객에게 내어주고 더 조용한 곳을 찾아 떠나셨다 하니, 송구스럽다.
지금까지 달려온 나의 삶이 제대로 잘 산 건지,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해가는 건지,
갑자기 내 앞에 화두 하나가 툭 던져진 느낌이다. 수도원 덕분에 긴 사유의 시간을 가졌다.
내일은 제우스의 탄생지 크레타섬으로 출발한다. 신화 속 이야기가 가득한 땅을 두루 만나볼 생각이다.
이 글이 게재된 책이 왔다
생에 첨이라 두구두구두구
기록을 남겨야 할 듯 하다.
교수님의 한끗 터치로 70점짜리를 99점으로 만들어놨다.
전문가의 한끗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진심 매우 감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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