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어제밤에 보낸 톡 메시지도 읽지 않고 있다. 정오가 가까워오는 이 시각에 말이다. 안되겠다. 얼른 가 봐야겠다고 집을 나섰다. 남편과 나는 온통 걱정으로 몸이 달아있었다.
딸이 독립을 한 지 2주 되었다. 집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학교 근처의 원룸에서 기냥 혼자 한번 살아보고 싶다며 스윽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렇게 독립을 했다. 어른들은 아직 딸의 독립을 결정하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설상가상으로 어젯밤 뉴스에선 한강변에서 실종된 대학생의 안타까운 소식도 있었기에 걱정이 걱정을 키워 빵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원룸으로 뛰어 올라갔다. 쾅쾅쾅 문을 두드렸다. 비번을 알고 있었으나 그 순간 비번은 커녕, 벨도 보이지 않았다.
빼꼼히 얼굴을 보이는 딸내미는 딱 자다 깬 부스스한 얼굴이었다. 우리가 상상하던 희망 시나리오 1번 이긴 했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오히려 자기가 깜짝 놀랐다고 화를 내는데, 어른들의 긴장했던 마음이 대책없이 무너졌다. 앞으로 ‘1일 1통화 없으면 용돈도 없다’는 매우 현실적인 규칙을 던져놓고 원룸을 나왔다. 요즘 젊은 딸과는 늘 이렇게 동상이몽이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 고, 온 김에 근처 30분 거리의 수원화성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화성행궁을 걸으며 속상한 마음을 추스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행궁을 둘러보기 전 안내문을 훑으니 설명이 국보급이다.
수원 화성은 정조 효심의 결정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원’으로 승격, 이장하기 위해 풍수지리상 좋은 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이미 수원부 관아가 있었고, 오래전부터 주민들이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이들을 이전하여 정착시키기 위한 새 도시가 필요했다. 그렇게 정조가 새로운 도시를 계획하고, 정약용이 설계하고, 채제겸이 현장 지휘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신도시가 탄생했다.
화성행궁의 봉수당에서는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열렸다. 회갑연을 위해 창덕궁에서 혜경궁 홍씨를 포함하여 6000여명이 출발했고 그중 1779명은 기록에도 남았다. 한강을 건너기 위해 정약용의 발명품 배다리도 건넜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구 대이동이었을 것이다. 평생을 남편의 기구한 삶을 간직한 채, 숨죽이고 아들을 키웠을 고통을 위로하기에 충분할 만큼.
7박8일간의 회갑연동안 화성행궁의 낙남헌에서는 화성백성과 먼 길을 함께한 신하들을 위한 경로잔치를 열었고, 별과시험을 열어 인재도 뽑았다. 그리고 득중정에서는 매화포를 터뜨려 백성들을 위한 불꽃놀이도 했다.
그런데 왜 창덕궁이 아니라 여기였을까?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가 동갑이었으니, 사도세자의 구갑 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현륭원이 있는 곳에서 함께 기리는 맘이었으리라.
정조는 11살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음을 맞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아마도 평생 그 트라우마를 갖고 살았을 것이다. 그의 평생 아버지의 복권에 힘썼다.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한 뒤 왕위를 세자에게 양위하고, 남은 노후를 이곳 수원 화성에서 어머니와 살 것을 꿈꿨다.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사도세자는 고종 때 왕으로 추존되었다.
‘왜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서 죽게 했을까?’ 사도세자는 영조가 늙으막에 얻은 귀하고 똑똑한 아들이었는데 말이다. 영조는 숙종과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의 아들이다. 영조는 적통이 아니라는 가십 속에 왕이 되었다. 자신의 아들과 손주로 왕통을 잇고 동시에 탄탄한 정치기반도 물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사도세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적으나, ‘나라를 이끌 수 있을 만큼의 맑은 정신이 아니었나 보다’로 조심히 짐작해본다. 영조는 세손으로라도 왕통을 잇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으리라.
‘왜 하필 뒤주였을까?’ 사약이라면 최소한 8일간의 잔인한 고통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설명은 이렇다. ‘죄인의 아들은 결코 왕이 될 수 없었기에, 사도세자를 사약을 내려 죄인으로 다스릴 수 없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형인 효장세자의 양자의 신분으로 왕이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마음속 오래된 궁금증이 풀렸다.
우리나라 조선의 역사 중에 영조와 정조의 시대를 르네상스 시대라고 한다. 두 왕은 유난히 책을 좋아했다. 행궁의 화령전에는 정조의 어진과 함께 이례적으로 정조가 평소 좋아했던 책을 보관하였고, 책의 보존을 위해 아궁이도 설치했다. 책을 통해 얻은 방대한 양의 지식이 통치기반이 되고 덕치기반도 되었을 것이다.
행궁 구석구석 옛이야기를 안고 있는 장소들을 카메라에 담다 보니 어쩌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역사 속 이야기 깊숙이 들어왔다.
수원화성은 199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원래 세계문화유산은 본래의 오리지널 건축물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외였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된 많은 부분을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보수하고 복원한 것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화성성역의궤>는 수원화성의 축성계획에서 건축방식, 사용재료의 출처, 시공기계, 가공방법, 동원인력, 심지어는 인력의 인적사항, 지불한 임금 등을 그림과 함께 자세히 기록한 일종의 공사일지이다.
화성 건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와 혜경궁 홍씨의 화성행궁에서의 회갑연을 기록한 <을묘원행의궤>는 조선왕조실록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됨으로써 자연히 세계기록유산이 되었다.
늦은 저녁에 전화가 왔다. 어버이날 선물로 무선이어폰을 주문해서 보냈다고 한다. 이건 뭐 미안함을 선물로 만회하겠다는 뜻인가? 기특하다고 해야 하나? 잠시 방심하는 사이 훅 들어오는 한마디.
“어린이날 내 선물은? 나 아직 어린이인데?”
왕족이나 우리 같은 소시민이나 생각의 온도차가 빛어내는 가족 간 동상이몽은 자연스런 현상으로 인정하고 수용해야 평화롭다.
<2021년 <<함께가는 낯선 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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