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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을 스위스 그뤼에르

여작반

by 별난 이 2022. 1. 9.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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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콩달콩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치열하게 전투적으로 산 것 같다. 풋풋하게 만나 젊음을 함께했다는 것 외에, 한 치의 양보 없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 살았다. 그런 우리가 어느덧 결혼 30주년을 맞았다.

남편은 평생의 직장을 퇴직하고 삼 년을 쉬더니 심심하다며 재취업을 했다. 그런데 재취업 시점이 딱 내가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야심차게 준비한 영국으로의 초대랑 맞물렸다. 영국 일주 10일과 런던에서 자유여행 5일로 계획했다. 물론 예약도 정산도 다 마친 상태였다. 우린 늘 이렇게 뭐가 잘 안 맞았다.

결국 영국 여행을, 아들에게 알바비를 주고, 모자간의 모양새 이상한 여행을 했다. 호텔 카운터에서는 이상한 눈빛도 감수해야 했다. 더블 침대를 예약한 청년과 중년의 여인이라니. 때때로 재미없고 고된 여행에 비해 알바비가 너무 싸다며 투덜거리는 아들과 재협상도 해야 했다. 현지에서의 모든 경비를 다 내 카드로 결제했다. 30주년 결혼 기념에 기대할 수 있는 낭만이나 스윗함은 없었다.

 

 

삐걱거리고 안 맞는 걸 맞추느라 애쓰며 산 30년을 기필코 토닥토닥 칭찬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준비했다. 이번엔 남편의 적극적인 호응을 유도하기위해 가보고 싶은 나라가 있는지 물었다. 그가 망설임 없이 선택한 나라는 스위스. ‘대자연 속에서 쉬고 싶다로 들렸다. 갑자기 힘을 내려놨다. 그동안 해 왔던 빡빡한 스케줄의 역사탐방이나 문화탐색과는 전혀 다른 컨셉의 여행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우여곡절을 뒤로하고 어렵사리 도착한 스위스, 뽀얀 안개가 우리를 먼저 맞이했다. 11시가 넘은 시각임에도 안개가 온 대지를 덮고 있어 것이 완전 낭만 그 자체 였다. 안개 망토를 온몸에 휘감고 렛잇고를 노래하는 가을 왕국 분위기로, ‘스위스의 대자연은 대략 이 정도!’ 라며 말을 걸고 있었다.

 

 

첫 여행지인 그뤼에르성은 입구부터 파스텔풍의 나뭇잎들이 하늘과 땅, 온 천지를 둘렀다. 파스텔 색감의 가을은 우리의 노랗고 빨간 가을 색과 전혀 다른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안개, 돌담, 단풍, 낭만 삼총사가 어우러져 가을의 깊이를 더했다. 난 이 한 컷으로 이미 스위스의 경관을 다 보았다고 생각했다.

 

 

 

 

비싼 입장료를 내고 성안으로 들어가니 고즈넉한 돌담 옆에 사람들이 동그랗게 모여있었다. 세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의 생일축하 파티였다. , 이건 뭐 세상 신박한 생일파티가 아닐 수 없다. 돌 위에 생일 케잌 하나 덩그러니 놓고 어른들이 빙 둘러서서 축하 송을 불러 주고 있었다. 화려한 풍선이나 꾸밈이 없는 모습은 너무나 소박한데, 성안의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럭셔리했다. 세상 어느 곳에 이만큼 아름다운 풍광 속 생일파티가 있을까 싶었다.

이런 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윽 생일파티 장소로 선택한 아이의 부모가 존경스러웠다. 이것이 일상이라니, 부러웠다. 행복한 아이와 더 행복한 어른들, 그리고 부러워 미치겠는 나, 모두 한 컷으로 기억에 콕 박혔다.

 

 

 

 

 

 

 

 

그뤼에르성의 가을을 찍고 내려오는데, 중세풍의 광장에 마을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하나둘씩 모인다. 그리고 곧 지휘자의 손길에 따라 하나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이런 종류의 합창은 검정 수트를 격식있게 차려입고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근엄하게 부르는 것을 숨죽이고 봐 왔던 터다. 형식 격식 다 무시하고 캐주얼 복장으로 클래식 합창을 하는 그 모습에서 나 또 가슴이 뛰었다.

격식을 갖추지 않아도 품위있고, 품위가 있음에도 접근하기 쉬운, 매우 일상적인 품격이었다. 아주 작은 순간에조차 의미를 부여하고, 매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 말이다. 과연 행복지수 3위의 삶은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뤼에르는 900년 전통의 방식으로 치즈를 만들고 있는 고장이다. 치즈라고는 까망베르가 전부인 둔한 입맛이지만, 이곳에서 흔한 퐁뒤 말고 라클렛에 도전했다. ‘아기 팔뚝만한 치즈를 전용 그릴에 녹여 감자에 얹어 먹는 요리이다. ‘저 큰 치즈를 누가 다 먹지?’로 시작했는데, 식사 끝 무렵 그 아기 팔뚝만했던 치즈가 거짓말같이 다 사라졌다. 내가 다 먹었단다.

여행지에서는 쓰러지지 않을 정도만 먹는다는 내 원칙을 깬 것이다. 그날 오후 배탈로 고생한 기억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지만, 맛있게 먹었기에 기분 나쁘지 않게 포장된 에피소드다.

 

 

나는 사실 스위스에서 넓은 초록의 목초지, 방목되는 가축들, 사시사철 눈 덮인 마테호른을 비롯한 영봉들, 여름에도 건재한 빙하 같은 자연경관만을 상상했다. 실제로 가을임에도 계절이 무색하게 폭설속의 마테호른을 마주했고, 빙하를 눈에 담았다. 등산객, 하이커, 스키어들을 위해 잘 계획된 철도, 접근성을 극대화한 케이블카에 감탄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있는 건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잔잔한 시내와 같은 평화로움을 보았고, 햇살 만나 빛나는 윤슬 같은 반짝임을 보았다. 우리네 삶도 이제 앞으로 말고 옆으로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반짝이는 삶이면 좋겠다.

여행 끝 무렵 왜 다시 방문하고 싶은 나라가 스위스였는지 남편에게 물었다. 그의 오랜 베프의 원픽 여행지가 이곳, 스위스였단다. 여행 중에 우리가 마주한 그 특별함을 친구는 우리에게도 권하고 싶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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