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내가 그 모임에 참석했는지 모르겠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아들 학교의 ‘부모와 아이가 함께하는 봉사단’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는데, 며칠 후, 신입 단장으로 지명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미 지명한 학부모가 수락 거부하는 바람에 어부지리로 나에게로 온 것이었다. 가끔씩 역사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시작되기도 하나보다.
‘샤프론 봉사단’은 전국의 중·고등학생들이 부모와 함께 봉사를 하는 단체이다. 1학년 신입생 중 봉사단에 가입한 학생은 40명이었다. 40명의 학부모가 머리 맞대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함께 수고할 것을 다짐했다. 목표도 정했다. 사춘기 아이들의 정서와 진로에 도움이 될 것과, 규칙적이고 지속적인 장애우 돕기를 지향할 것.
그러나 막상 현실은 달랐다. 봉사를 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학생과 학부모 80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일을 할 만큼 널따란 곳이 없었다. 게다가 사춘기 남학생들은 봉사처에서도 꺼렸다. 섬세하지도 못할뿐더러 힘으로 하는 일은 거칠었다. 나는 비교적 학교와 가까운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에 있는 모든 복지 시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노크를 했다. 그들에게는 삶이기에 받아들이는 모습도 각각 달랐다.
우선 우리는 학부모와 아이들이 자신의 용돈을 줄여 복지시설을 후원하도록 했다. 그리고 장애우와 아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활동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총단장이 되어서는 관내의 모든 시설과 단체의 월례 회의에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거의 매일 하루에 두세 군데 회의에 참석하는 건 기본이었다. 그 시절 우리 집 식탁에는 김과 김치가 반찬의 전부였다고 식구들은 기억한다.
거동이 불편한 장애우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은 외출하여 세상 구경하기, 수영장 가서 놀기, 영화 관람하기였다. 그들은 할 수 있는 게 적었다. 세상이 이렇게 넓고 재밌는 것도 많은데, 그들은 좁은 세상 속에 있었다. 한 번 외출을 할라치면 비용도 비용이지만 평소의 두세 배의 인력이 필요했다. 언제 어디에서 다칠지 모를 일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린아이를 케어하는 것과 비슷했다.
나는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특별히 좋았다. 영화 관람을 넘어 클래식 공연 관람의 기회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평소 생각했다. 봉사단을 향한 나만의 세 번째 소망이었다. 내 자식들과 함께 했던 것, 내가 좋아하는 것, 소중한 추억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요원한 일이었다. 클래식은 관람료도 관람료인데, 공연 매너를 이들이 지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떤 공연장에선 아예 입장을 저지하기도 했다.
어느날 서초구 사회복지센터 회의에 참석했다가 관내의 행사를 알게 되었다.. 이제 막 창단하는 <필하모니아 코리아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윤봉길 회관에서 몇 회에 걸쳐 있을 것이고 무료 관람이 가능한데 관객이 없다는, 고오급 정보였다. 나는 샤프론 서초지부에서 ‘장애우와 함께 하는 클래식 관람’을 진행하고 싶다고 전했다. 봉사단의 서초지부 회장은 또 일거리를 만든다고 나를 아래로 위로 째려보며 투덜거렸으나, 우린 호흡이 맞아 일을 척척 잘해 왔던 콤비였다.
<숲속의 나눔 교향악> 봉사 계획은 이랬다. 일 가구 일 장애우 픽업, 공연 관람, 양재 시민의 숲에서 점심 도시락 소풍, 게임과 놀이, 복지원 복귀. 학교에는 학생들의 교외 활동에 대한 계획 보고를 하고, 각 복지원에는 함께 외출 가능한 장애우의 외출을 허락받고, 학부모에게는 라이드와 일일 봉사 지원을 받았다. 오케스트라단에도 우리 관객들의 사정을 알리고 허락을 받았다.
마침내 2009년 7월의 어느 날, 공연장에는 장애우들을 태운 버스와 자동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학생과 학부모의 줄이 끝없이 길게 세워졌다. 차에서 내리는 장애우들과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이 손에 손잡고 공연장으로 입장하는 행렬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뭉클했다.
그 넓은 공연장은 우리들로 꽉 찼다. 클래식 공연이 처음인 학생들도 있었을 것이다. 모두 생소한 공연 분위기에 낯설어했지만, 곧 압도당했다. 숨죽이고 들어야 할 때는 함께 숨죽였고, 박수를 쳐야 할 때는 함께 손뼉 치며 팡팡 터지는 즐거움을 표현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악장과 악장 사이에 튀어나오는 박수나, 혹 길게 이어지는 박수에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너무나 감동적인 순간과 순간이 이어졌다.
자칫 ‘공짜 공연’과 ‘동원된 관객’이 될 뻔한 공연이,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는 고귀한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기에 가능했다. 양보하는 마음이기에 가능했다. 나는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얼마나 큰 감동으로 그들의 가슴을 노크했는지는 모르겠다. 얼마나 신비로운 쫄깃함으로 그들을 새로운 세계에 빠뜨렸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순간 그 모습이 내겐 더할나위 없는 감동과 쫄깃함과 뭉클함으로 남아있다.
이날의 활동은 <서초샤프론 봉사단의 ‘온가족 자원봉사’>라는 제목으로 한겨레 신문 칼럼에 소개가 되었다. 이슈가 된 건 물론이다. 나의 학교 단장으로써 가졌던, 요원한 일이라 생각했던 세 번째 소망을 이룬 것이기도 했다. 나에게도 매우 뜻깊은 일이었다.
오늘 모인 엄마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삼 년 동안 꼼꼼하게 옆에서 뒤에서 도왔고, 힘을 보탰다. 바쁜 일정을 나누어 담당했고 내 일처럼 진심이었다. 혼자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을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했기에 해낼 수 있었다. 애들이 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음에도 믿고 만나는 ‘찐친’인 이유다.
어려서부터 남을 배려하고, 시간과 돈과 마음을 나만의 것으로 묶어두지 않고 나누는 걸 경험한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세상을 밝히는 주인이 될 것이며, 변화시킬 것이고, 결코 어둠과 타협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이하는 한겨레 신문 홈페이지에서 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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