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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가을. 창경궁

궁궐 랜선투어

by 별난 이 2021. 11. 4.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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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늦게 창경궁에 도착한 탓에 깊은 햇살은 비껴갔다.

집합금지 1단계로 완화되어서인지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음청 많았음.

 

 

평상시 텅텅 비어있던 주차장도 만차. 30분이나 기다려야했다.

주차요원이 그나마 친절하고 싹싹한데다 부지런히 고군분투하는 모습이라

우리도 짜증내지 않고 기다릴 수 있었다.

한 사람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는지...

고맙다.

 

 

창경궁은 이곳이 뷰 맛집인듯.

 

여기서 계속 찍다가

철푸덕 소리의 진상을 캤다.

삼각대가 부실한듯.

자꾸 촛점이 흔들린다.

그래서 원치 않게 회화사진이 된다.

단점은...눈이 아프다는것.

한 곳은 촛점이 맞아야 하는것인디...

 

 

가을. 낭만. 청춘. 남녀.

 

 

 가을남자.

 

낙엽으로 주단을 깔아놓은 풍경은

증~말 찐이다 

 

 

 

담장. 기와. 나무.는 세뚜.

 

 

 

버드나무와 회화나무의 만남이란다.

혜경궁 홍씨와 정조를 빗대어 놨다.

난 혜경궁 홍씨의 또 다른 입장을  생각해 본다.

당파 이야기다.

 

영조 이야기로 올라가야 한다.

영조는 숙종과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의 아들로

숙종에게는 희빈장씨와의 사이에 경종이 있었다.

경종이 건강이 안좋았고, 아들이 없이 승하하자

숙종의 다른 아들, 영조가 노론의 힘을 입어 왕이 된다.

영조는 치리하는 동안 왕위계승의 정통성 시비를 피할 수 없었다.

영조는 늦으막이 얻은 사도세자를 경종을 모셨던 소론의 궁인들에게 보내 키우게 된다.

아마도 탕평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소론 궁인의 보살핌하에 자란 사도세자는 영조의 눈밖에 나게되고,

그 광기로 많은 물의가 일자, 영조는 사도세자를 8일간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한다.

그때 뒤주를 제공한 사람이 사도세자의 장인,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 이라는 이야기가있다.

소론사람들에게서 자란 사도세자의 처가는 노론사람들 이었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왕이 되자

정조역시 노론세력, 즉 혜경궁홍씨의 친정이자 자신의 외가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남편과 아들의 대적이 된 친정 사이에서 노심초사 했을 혜경궁 홍씨.

 

왕위 정통성의 시비를 미연에 방지하기위해

영조는 정조를 사도세자의 형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를 물려주었다.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자식이 왕 임에도 불구하고 왕의 어미가 아닌, 영원한 세자빈으로 남았던 이유다.

 

정조는 자신을 끊임없이 공격하는 노론세력이 득세하고있는 한양에서 희망이 없음을 판단하고

새로운 신도시 화성을 세운다. 

표면상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는 묘호를 올린다는 이유였다.

정조는 혜경궁홍씨의 회갑연, 아버지 사도세자의 구갑을 화성 봉수당에서 치르기위해

창덕궁에서 무려 6000여명과 함께 행차했다.

그리고 그간 화성에서 키워온 무사들의 군사훈련을 보여주어 왕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연이라고 하기엔 이상할 정도로 타이밍 맞게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후 왕위 복권을 위해 애쓰고자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조는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한다.

순조가 11살때의 일이다.

이때, 혜경궁 홍씨의 손자인 순조는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는다.

정순왕후는 영조가 66세에 맞이한 부인으로서 혜경궁홍씨보다 10살이 어린 시어머니였다.

혜경궁 홍씨는 순조의 할머니 임에도 법적으론 효장세자빈의 손자가 됨으로 이때에도 비껴가야했다.

 

혜경궁 홍씨는 사망한지 80년 후 고종에 의해서야 황후가 된다.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 황제로 추존함으로써 이다.

 

그 살얼음판같은 세월을 이 창경궁에서 지내면서,

혜경궁 홍씨와 정조가 서로 의지하며 지냈을 것이라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아직 단풍이 이른 모양이다. 이곳이 젤 붉은 가을

글로써 남긴다는 것이 지금 큰 의미가  아닌 작은 일일지 몰라도

언젠가 필요할땐 큰 기록이 될 수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당시 혜경궁 홍씨가 한글로 써 내려간 자전적 회고록이 큰 대접을 받았을리 없다.

조선왕조실록이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자신과 관련된 역사 이면의 이야기를 어찌하여 그리된 건지 세세하게 적어 놓은 것이

나중에라도 황제로, 황후로 복권되는 데 일조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역사학자들은 혜경궁홍씨가 손자인 순조에게 알리기위해 정치적인 의도로 작성되었다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할머니로써 손주가 실록 이면의 진실을 알아야한다고 생각했던것 같다.

매우 중요한 순간의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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