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색연필

송글송글 추억

by 별난 이 2023. 8. 2. 17:28

본문

중학교 2학년 학기 종강 때의 일인 것 같다.

우리들은 방학을 앞두고 교장선생님 말씀을 듣기 위해 운동장에 일렬로 서 있었다.

말씀이 끝나고 각종 상 시상을 앞두고 있었는데, 예기치 않은 순서에, 예기치 않은 내 이름이 호명이 되었다.

흔한 성적 우수상도 아니고, 개근상도 아니공...

이름도 생소한 선행상..

 

상을 받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내 이름이 왜? 동명이인 인가? 누가 상장에 이름을 잘 못 기재했나?

선행이라곤 당최 근처에도 가 보지 못했구만..

단상에 올라가서 남의 자리에 잘 못 선 사람마냥 어영부영 쭈구리로 서있으니 들려오는

선행의 내용...

.

.

.

.

 

우리 셋은 1학년때 엄청 코드가 잘 맞았다.

2학년으로 올라가서도 같은 반이 되어야 한다며 으쌰으쌰 했었다.

전혀 안 해보던 "간절한 기도"를 했다.

그 기도 덕분인지 셋 중 K 하고만 같은 반이 되었다.

 

그러나...

친구 K의 집안 상황이 어려워졌는지, 학기 내내 수업료를 내지 못한 친구들에 끼어 호명되더니,

학기가 끝나가는데도, K는 계속 교무실로 불려 가고 있었다.

당시엔 아침 조회시간마다 수업료를 내지 못한 아이들을 호명했고, 교무실로 불렀다.

난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창피할 친구 생각에 속상했다.

아버지께 좀 도와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아버지는 공감하지 못하셨다.

'정 돕고싶으면, 그동안 내가 학교에 붓고 있던 적금을 해약해서 친구 수업료를 해결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셨다.

당시엔, 학교에서 내 명의 통장도 만들어 주고, 적금도 걷어가 일괄적으로 입금을 해 주고 있었다.

난 매달 5000원씩의 적금을 붓고 있었다. 물론 엄마 찬스였지만.

아버지는, 누군가를 돕기위해선, 내 것을 포기하고 돕는 걸 가르치신 것 같다.

그러나 아뿔싸, 통장은 내 명의라 할지라도, 내 맘대로 해약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담임 선생님의 재가가 있어야 했다.

담임 선생님께서 해약 이유를 물으셔서, 쥐꼬리만 한 소리로 "K 수업료를 빌려주려고요."

난 고등학교 등록금을 위해 모아오던 적금을 해약했고,  친구는 더 이상 아침마다 호명 당하지도, 교무실에 불려 가지도 않았다.

.

.

.

.

선행상에 대략 그 내용이 들어있었다. 얼추 이야기가 맞긴 하다.

단상에 서서, 담임 선생님이 조금 확대해서 이해하셨지... 싶었다..

난 돈을 빌려줬을 뿐, 준 게 아니었으니까 결코 선행은 아니라 생각했다.

근데, 그걸로 상까지 받았으니 난 K에게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미안했다.

담임선생님께 항의했으나, 이미 전교생 앞에서 받은 상, 무를 수도 없고,

친구에게 면목이 안 섰다...

 

그런 이유로 우린 조금씩 멀어졌다.

나는 미안해서, 친구는 배신감이었을 거다.

빌려줬다고 생각했을 땐, 언젠간 되돌려 받을 꺼였기에, 주고 받으면 끝나는 일이었는데, 

상으로 인해, 공식상 준 게 되었고,  보상을 상으로 받은 게 되었다.

이미 상황 종료. 게임 셋.

좋은 뜻이,  다른 이의 좋은 해석으로 인해, 이상하게 엉켰다.

 

오늘 P 아들의 결혼식에 도대체 입장 불분명한 하객으로 갔다가

중학교 졸업 앨범을 열게 되었고,

내 사진 바로 옆에 똭 박재되어 있는, 중학 시절 내내 친했고 좋아했던 K가 보였다.

.

.

.

 

K 아버지의 색연필 공장이 어려워졌다고 했다. 그녀도 공장에 나가 아버지를 도왔다.

자기가 만든 완제품을 가져와 우리에게 주기도 했다. 나는 한동안 그걸 소중하게 보관했다.

내 아들 딸이 어려서 색연필을 쓸 때에도, 문방구에서 색연필을 고를 때에도, P가 떠올랐다.

어떻게 살고 있으려나...

 칼로 깎는 색연필이 넘쳐났어도,

그녀 아버지 공장에서 생산했던, 돌돌 말려있는 종이를 살살 풀어썼던,

색연필을 애들에게 쥐어줬다.

이게 원조야.

애들이 자라 어른이 되고, 집에서조차 더 이상 색연필의 존재가 없어지자, 자연스레 K도 잊었다.

잊고 살았다.

그 기억을 오늘 다시 떠올렸다.

아... 이제라도 P를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설명을 해야겠다. 돈의 출처와, 선생님이 알게된 경위를 말이다.

 

 

'송글송글 추억'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억나니, 수영 시험?  (0) 2023.08.02
강원도 사투리  (0) 2023.07.17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