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오래전 특발성 혈소판 감소증이라는 병을 진단받고, 큰 수술을 받았다.
특발성이란 원인 불명이란 의미이고,
혈소판은 우리 혈액의 응고를 담당하는 세포이다.
혈소판이 부족하면, 혈관이 잘 파열되고, 혈액이 응고가 되지 않아 피가 계속 흐른다.
신체 내부에서 혈관이 터지거나 뇌출혈이 오면, 응급한 사태로까지 진전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거다.
그 혈소판은 우리 몸에서 하루에 몇만 개씩 생성되고 사멸되어 항상 일정한 수치를 유지하게 되는데,
생성량이 적거나, 사멸량이 많게 되면, 수치가 떨어진다.
해서, 혈소판의 사멸을 담당하는 장기인 비장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당시 혈소판 수치가 정상 기준 10% 수준이어서 수술을 받을 수 없으니, 수술 가능한 수치로 올리기 위해 가장 강력한 조치인 스테로이드를 매일 투입했다. 한 달여 투입한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은 어마어마했다. 얼굴이 달덩이가 되고, 온몸은 뚱뚱해졌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먹은 거 마냥 그렇게 퉁퉁 불어있었다. 마침 딱 그 타이밍에 둘째가 돌을 맞이했기에, 우린 가족사진을 남겼다.
어쩜 마지막 가족사진이 될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진지하게 진행했다.
그리고 그 가족사진은 그 시절 그 사건의 증명사진으로 남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남긴 증명사진으로 말이다.
그 후 회사에선 일이 바쁘지 않은 한직으로 남편을 발령 내주었다.
최대한 스트레스받지 말고 몸을 잘 건사하라는 배려였다.
운동이라면 몸서리치던 남편은 퇴근 후 매일 밤 우면산을 등반했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를 포함하여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살고자 하는 의지에 채찍이 된 것 같았다.
난, 그동안의 우리의 생활 태도를 뒤돌아 봤다. 건강서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병의 재발을 막기 위한 나의 최선은 먹거리를 개선하고, 규칙적인 식생활을 지켜주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항상 최 선두에서 달리던 남편은 승진 인사에서 최고 선두 그룹에서 뒤처지자 조바심을 냈다.
죽음이 눈앞에 입 벌리고 웅크리고 있을 땐, 죽음만은 면하기 위해 최선이더니,
한 걸음 벗어나 삶의 영역에 들어서니, 눈앞에서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세상의 권력에 삶을 통째로 맡긴다.
그런 게 인간 본성인 거다.
남편의 조바심 덕인지, 기원 덕인지, 그동안 건강이 정상으로 회복되었다고 판단이 되었는지,
회사는 남편을 승진시켜 원주로 발령을 냈다.
최 선두는 아니어도, 최소한 선두 그룹에는 속했다 생각되었다. 그만하면 되었다.
40이 되기도 전에 갓난쟁이 아이를 둘씩이나 둔 과부가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터에,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고 남편 혼자서 고군분투하라고 원주로 보낼 수가 없었다.
전쟁터에서 남편이 총을 쏘는 무사라면, 난 총알을 장전해 주는 전우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삼 시 세 끼는 챙겨주는 것.
남들은 아이들 교육을 핑계로 절대 서울을 고수하는 마당에, 내가 원주행을 결정한 건 무엇보다 남편 건강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내 호적상 본적지는 강원도 원주시 평원동...으로 시작한다.
아버지가 원주에서 근무 중이실 때 태어났으나, 그곳에서의 기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서류상 남아있는 고향이었다.
어른이 되도록 서울을 떠나본 적이 없는 나는 두려웠다. 사택은 구도심의 아파트 23층이었다.
고소공포증이 있어도, 앞 뒤 아무것도 따지지 않았다.
어느 인생 선배는 작은 도시에서 커뮤니티에서의 언행을 조심하라는 조언을 했다.
나는 몰라도 그들은 나를 다 알게 되는 중소도시의 생리를 이미 경험하여 잘 아는 분이었다.
난 외부 활동 없이 아이들만 케어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처음으로 외부인을 만났다.
아침마다 엘리베이터를 내려 외치는 "세탁소" 아저씨였다. 세탁물을 맡기기 위해 현관문을 열었다.
아저씨의 첫마디에, 그동안 외지인으로 가졌던 알 수 없는 긴장과 불안이 대책 없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그건 참으로 익숙한 어릴적 그 시절을 마주한 때문이다. 자라면서 내가 듣고 말하고 온천지에서 공기처럼 녹아있던 강원도 사투리 말이다.
아, 이런 게 고향 느낌이구나..
난 국민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가 평생을 최전방 강원도 오지로만 근무하다가 정년퇴임이 임박하자 마침내 서울로 발령이 났다.
난 서울 아이들의 어쩐지 세련된 모습과 다른 내가 싫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도시느낌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시골티 말이다. 참으로 오랫동안 시골티가 묻어났다. 고등학고 사춘기 시절 내내 서울 말투를 위해 강원도 사투리를 지우려 애썼다. 그 시절 하늘만큼이나 무겁고 큰 고민은 오로지 강원도 억양과 사투리였다. 오랜 시간 끝에 마침내 강원도 그 사투리를 지웠고 고향 강원도를 잊었다.
그러나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맞닥뜨린 그 억양 사투리는
두려움을 스르륵 끌어 내리고, 포근하게 감쌌다.
너랑 나랑은 같은 종족이니, 이제 편하라 권하는 듯했다.
내 고향은 강원도래요~^^
내 안에서 외치고 있었다.
색연필 (0) | 2023.0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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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니, 수영 시험? (0) | 2023.08.02 |